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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삼국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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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위는 삼국 시대 촉나라의 인물로, 유언을 따라 익주로 들어갔으며 유언 사후 유장의 정동중랑장이 되었다. 유장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표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파군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언 사후 유장을 익주목으로 세우는 데 관여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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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삼국지 인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위(趙韙) / 조영(趙穎)
출생지파군 안한
사망일201년
사망지파군 강주
사망 원인타살
국적후한
직업관료
경력태창령 → 장하사마 → 정동중랑장
적수유장

2. 생애

188년(중평 5년), 조위는 중앙에서 태창령(太倉令)을 지내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1] 194년(흥평 원년), 유언이 사망한 후, 조위는 유장의 정권 수립을 도왔고, 정동중랑장(征東中郞將)이 되어 유표에 대항하여 파군 구인현(朐䏰縣, 朐忍縣)에 주둔하였다.

이후 유장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이가 멀어졌다. 조위는 익주 사람들의 원한이 커져가는 상황을 이용하여 반란을 계획하고, 200년(건안 5년) 유장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201년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조위는 파군을 분할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그의 건의와 이후 조정 과정을 거쳐 파군은 셋으로 나뉘었고, 이를 삼파(三巴)라 부르게 되었다.[2] 조위가 건의한 때는 정확한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다.[3]

2. 1. 익주로의 이주와 유장 정권 수립

188년(중평 5년),[1] 중앙에서 태창령(太倉令)을 지내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신임 익주목 겸 감군사자(監軍使者)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194년(흥평 원년), 유언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장하사마(帳下司馬) 조위와 치중종사(治中從事) 왕상(王商) 등은 유언의 아들 유장이 온화하고 어질다며 후임으로 추대하였다. 조정의 인가를 받아 유장은 아버지의 관직에 올랐고 조위는 정동중랑장(征東中郞將)이 되었다. 조위는 형주유표에 대항하여 파군 구인현(朐䏰縣, 朐忍縣)에 주둔하였다.

2. 2. 유장과의 갈등과 반란

188년(중평 5년),[1] 중앙에서 태창령(太倉令)을 지내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신임 익주목 겸 감군사자(監軍使者)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194년(흥평 원년), 유언이 병사하였다. 장하사마(帳下司馬) 조위와 치중종사(治中從事) 왕상(王商) 등은 유언의 아들 유장이 온화하고 어질다며 후임으로 추대하였다. 조정의 인가를 받아 유장은 아버지의 관직에 올랐고 조위는 정동중랑장(征東中郞將)이 되었다. 조위가 형주유표에 대항하여 파군 구인현(朐䏰縣, 朐忍縣)에 주둔하였다.

유장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이가 멀어졌다. 당초 유언은 남양군삼보(三輔) 일대에서 익주로 흘러들어온 유민 수만 호를 친위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동주병(東州兵) 혹은 동주사(東州士)라 불렸는데, 유장은 유순하고 위엄이 없어 동주인들이 익주 토박이들을 침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익주 사람들의 원한은 날로 커졌고, 유장은 평소 민심을 얻고 있던 조위에게 이 문제를 맡겼다. 조위는 오히려 반란을 계획하였다. 유표와 화친하고 익주의 유력 가문들과도 은밀히 결탁하여 200년(건안 5년), 유장을 공격하였다. 촉군, 광한군, 건위군도 이에 호응했고 그 규모는 수만 명이었다. 유장은 성도성에서 농성하고 동주인들은 조위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한마음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결국 조위가 패퇴하고 강주현(江州縣)까지 역공당한 끝에 부하인 방락(龐樂)과 이이(李異)에게 피살당했다. 201년의 어느 날이었다.

2. 3. 파군 분할 건의

조위는 파군을 둘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파라는 이름은 고향 땅에서 유지하길 바랐으므로 점강현(墊江縣) 이상 지역을 계속 파군이라 하고 치소는 안한현에 두자고 하였다. 당시 태수방희였다. 이후 유장이 강주현부터 임강현(臨江縣)까지를 영녕군(永寧郡), 구인현부터 어복현(魚復縣)까지를 고릉군(固陵郡)으로 분할함으로써 파군이 비로소 셋으로 갈라졌다.[2]

201년, 어복현 사람 건윤(蹇胤)이 군 이름을 조정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유장은 영녕군을 파군으로, 고릉군을 파동군으로, 방희가 담당하던 파군을 파서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로써 삼파(三巴)가 정립되었다.[2] 한편 조위가 건의한 때는 《화양국지》가 초평 원년, 초주의 《파기》(巴記)가 초평 6년이라 하였다.[3] 그런데 초평 원년은 유언이 살아있을 적이며, 초평은 6년이 없으므로, 모두 전후 사정이 일치하지 않아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제59회에서 유언 사후 조위 등이 유장을 익주목으로 세웠다고만 언급된다.

참조

[1] 서적 자치통감
[2] 서적 화양국지
[3] 서적 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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